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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마을, 그 시간위에 머물다. 서악마을그시간위에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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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마을, 그 시간위에 머물다

...
마음에 드셨나요?
[ComplexContentWithDelimiter][DeliAbstract]

아침부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왠지 공짜 밥을 먹게 될 것 같은 날이라는, 별것 아닌데 묘하게 기분 좋은 예감이었다. 이런 예감이 적중할 때가 종종 있다. 도서관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가까이 사는 여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시 후,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생의 얼굴이 보였다.


, 웬일이야?”

 

반가움이 먼저 튀어나왔다. 동생은 아버지 물리치료 시간 동안 잠깐 책을 보려고 들렀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각이었다. 그냥 보내기에는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질 것 같았다. 정 없이 흩어지기엔, 오늘의 예감이 아까웠다.

 

오늘 같이 점심 먹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 시간 남짓, 그렇게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동생은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나는 먼저 식당으로 가서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계산을 먼저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다 먹고 하지 뭐, 마음을 접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저 오늘의 예감이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조용히 지갑을 여셨다. 주섬주섬, 익숙한 손짓으로.

 

아버지, 계산하시려고요? 제가 할게요.”

 

이미 계산했노라고 말하려는 찰나, 아버지는 기어이 돈을 내미셨다.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사실 농담처럼 오늘은 아버지가 우리 밥 사주세요.라고 말해볼까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처럼, 먼저 지갑을 여셨다. 예감은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날 음식은 유난히 간이 심심했고, 그래서 더 맛이 깊었다. 동생도 아버지도 말끔히 비운 그릇을 바라보며 잘 먹었다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왠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밥 한 끼였을 뿐인데, 그날의 점심은 쉽게 끝나지 않는 여운을 남겼다. 식사를 마친 뒤, 아버지와 동생은 다른 길로 바람을 쐬러 갔고 나는 혼자 서악마을로 향했다. 같이 가자고 하진 않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괜히 가벼워진 오후였다.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불었지만,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무열왕릉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악마을 고분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평일의 서악마을은 조용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간혹 차 한두 대가 멀리서 지나갈 뿐, 길은 거의 나 혼자 차지한 듯했다. 바람 소리와 내 발자국, 소리만이 번갈아 귀에 닿았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이 아직 많은 이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어서인지, 서악마을은 늘 한 템포 느린 시간을 품고 있었다.

 

3월부터 문화해설사 강의를 듣게 될 서악 문화공간을 지나 서악서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앞으로는 이 길을 설명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걸어야겠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걷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혼자 걷는 시간은 설명이 필요 없어서 좋았다.

 

봄이면 이곳 고분 주변 삼층석탑 곁에 작약꽃이 활짝 핀다. 가을이면 구절초가 길가에 소복이 피어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하지만 오늘은 겨울의 끝자락, 꽃 대신 바람이 머무는 계절이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고분들 사이를 찬찬히 걸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능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 이름이 남지 않은 사람, 그러나 분명 이곳에서 한 시대를 살았을 누군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사부작사부작 걷다 보니, 예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가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풀숲에 묻혀 있던 고분들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이렇게 다시 빛을 보게 되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서악마을에는 무열왕릉을 비롯해 수많은 고분과 서악서원, 도봉서당, 삼층석탑이 함께 숨 쉬고 있다. 한때는 볼품없다고 여겨졌을지 모를 마을이, 이제는 누구나 와서 머물 수 있는 역사와 사색의 공간으로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그 변화는 요란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공짜 밥의 예감으로 시작된 하루는 그렇게 서악의 바람 속으로 흘러갔다. 아버지의 지갑을 떠올리며, 고분 앞에 서서 오래 멈춰 섰다. 누군가는 밥 한 끼로 마음을 건네고, 누군가는 이름 없는 무덤으로 시간을 남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걷고, 생각하고, 기록하려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끼의 점심과 한 사람의 오후 산책에서.

 

수정 드림


[DeliAuthor]

나의 유년 시절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혼하면서 지금 인생의 절반을 좌절과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좋은 인연 덕분에 지금은 다행스럽게 귀한 분을 만나 평소 하고 싶었던 책 쓰기를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DeliList]

프롤로그

 

1. 예감이 맞았던 하루

2. 혼자 걷는 오후, 서악으로

3. 고분앞에 멈춰서다

4. 마을이 바뀌고 마음도 바뀐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