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인류는 단어를 잊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사랑', '정의', '국가'와 같은 추상적인 명사에서 시작되었다. 곧이어 '집', '빵', '물'처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이름들마저 안개처럼 흩어졌다.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가 퍼지며, 인류 문명의 근간이었던 언어 체계가 송두리째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려한 언변으로 대중을 현혹하던 정치인, 복잡한 개념으로 세상을 재단하던 지식인, 법 조항으로 권력을 유지하던 법률가들이 가장 먼저 몰락했다. 그들의 힘은 명명하고 정의하는 능력에서 나왔지만, 이제 그 무엇도 정의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의 권위는 허공으로 증발해버렸다. 인류는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소통의 도구를 잃어버린 문명은 순식간에 원시 상태로 퇴보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단어라는 불완전한 포장지를 잃어버린 인간은,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직접 읽기 시작했다. 눈빛의 미세한 흔들림,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체온의 변화, 고요 속에서 느껴지는 뇌파의 파동이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거짓과 오해를 만들어내던 언어가 사라지자, 타인의 기쁨과 슬픔이 어떤 필터도 없이 영혼에 각인되는 '공감의 대폭발' 시대가 열렸다. SF 소설 『실어증 군도』는 언어의 상실이 곧 인류의 퇴보가 아닌,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진화일 수 있다는 도발적인 상상력을 펼친다. 바벨탑이 해체된 세상, 만물이 이름표 없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이 거대한 사유 실험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아는 모든 단어를 삭제했을 때, 그곳에 남는 '진짜 나'는 누구인가?"
[DeliAuthor]의대를 졸업했다. 현재 산문작가, 콘다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이다.
[DeliList]프롤로그: 단어가 사라지는 순간 Chapter 1: 침묵의 전염, 글로솔라리아 Chapter 2: 무너지는 바벨의 언어 감옥 Chapter 3: 공감의 대폭발, 투명한 마음의 시대 Chapter 4: 실어증 군도에서의 삶 Chapter 5: 우주와 나누는 최초의 대화 에필로그: 이름 없는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