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흐드러진 길 위에서. 봄은 늘 그렇게 온다. 기다린 사람에게는 조금 늦은 듯, 아무 생각 없이 지나던 사람에게는 문득 놀라울 만큼 가까이.
경주의 봄은 유난히 하얗다. 연분홍이라기보다, 눈부신 흰빛에 가까운 벚꽃들이 도시를 덮는다. 마치 오래된 시간 위에 새하얀 천을 덮어주는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깊게 스며든다.
대릉원 돌담길을 걷는다. 돌담 너머에는 천년을 잠든 왕들이 있고, 담장 밖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이를 잇는 길 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바람이 분다.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꽃잎들이 한순간에 흩어진다. 허공을 맴돌다 천천히 내려앉는 그 모습은, 마치 시간의 조각들이 부서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기억과 순간이 겹치는 자리에서.
그저 걷고 있을 뿐인데, 마음은 자꾸만 가벼워지고, 생각은 멀어지고, 어느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그 순간이 좋다.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나. 벚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그래서 더 아쉽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 짧은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매년 다시 이 길을 찾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 길을 걸으며 내가 보았던 것들, 느꼈던 것들, 그리고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던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나는 잠시, 나를 만났다.
수정 드림
조용한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보다, 천천히 머무는 순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고 믿는다.
오래된 시간과 이야기가 깃든 공간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를 글로 남기고 있다.
특히 경주의 고요한 풍경과 천년의 시간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화려한 말보다 담백한 문장으로, 크게 드러내기보다 조용히 스며드는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 책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대릉원 돌담길을 걸으며 만난 시간과
그 안에서 다시 마주한 ‘나’에 대한 기록이다.
프롤로그
1. 봄이 시작되는 순간
2. 대릉원 돌담길
3. 꽃과 왕릉
4. 나를 만나는 길
5. 꽃이 지는 자리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