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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천에 잠든 여왕. 도리천에잠든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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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천에 잠든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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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천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다오.”

신라 제27대 왕 선덕여왕은 세상을 떠나기 전, 신하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하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도리천이 어디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리천은 사람이 사는 땅의 이름이 아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의 세계,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는 이상향이었다. 인간의 발로는 닿을 수 없는 곳. 살아 있는 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황한 신하들에게 여왕은 조용히 말했다.

낭산 남쪽이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1,3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이상한 마음이 된다. 죽음을 앞둔 한 왕이 왜 자신의 무덤을 하늘의 세계와 연결하려 했을까. 어째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낭산이라는 장소를 선택했을까. 그리고 신라인들은 왜 그 작은 산을 그토록 신성하게 여겼을까.

 

경주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남산부터 떠올린다. 수많은 불상과 탑, 절터가 산 전체에 남아 있는 거대한 신라의 성지. 하지만 낭산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름조차 낯설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시간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낭산은 결코 작거나 가벼운 산이 아니다.

낭산은 월성의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백 미터 남짓. 산이라기보다 낮은 언덕에 가까운 곳이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특별한 장소로 여겼다. 선덕여왕릉을 비롯해 사천왕사와 망덕사, 황복사와 능지탑 같은 중요한 유적들이 낭산 주변에 남아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떤 학자는 낭산을 두고 파도 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낭산은 설명되지 않는 기운을 품고 있다. 높지 않은 산인데도 가까이 다가가면 묘한 침묵과 무게가 느껴진다.

 

처음 낭산을 올랐던 날도 그랬다.

숲길 초입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빽빽하게 들어선 소나무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었고, 바람은 오래된 솔 향기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 발밑에는 마른 솔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숲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 마치 아주 오래전 시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걷자 갑자기 숲이 열리며 봉긋한 능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덕여왕릉이었다.

둥글게 솟은 능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 앞에 서자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어둑한 숲길과 달리 능 위에는 햇살이 가만히 내려앉아 있었고, 좌우의 소나무들은 마치 여왕을 지키는 호위무사처럼 능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무 가지들이 낮게 흔들렸다. 천년의 시간이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한 듯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었다.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장녀로 태어나 수많은 반대와 불안을 넘어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시대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은 거세졌고,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혼란 속에서도 여왕은 첨성대를 세우고,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 구층목탑이라는 거대한 염원을 세상 위에 올려놓았다. 신라가 훗날 삼국통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토대 역시 그녀의 시대에 마련되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왕관은 언제나 외로운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재위 말기, 귀족 세력의 반발은 점점 거세졌다. 결국 상대등 비담은 여왕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킨다. 훗날 역사책에는 짧게 기록되었지만, 그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왕궁은 얼마나 불안과 공포 속에 흔들렸을까. 그리고 병든 몸으로 그 시간을 견뎌야 했던 여왕은 또 얼마나 깊은 고독 속에 있었을까.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시작된 직후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리천을 말했는지도 모른다. 인간 세상의 다툼과 욕망을 지나, 조금 더 평온한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낭산에 서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바람은 오래된 소나무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햇살은 여전히 왕릉 위에 내려앉는다. 수많은 왕과 귀족, 승려와 화랑들이 오갔던 시간은 사라졌지만, 산은 아직 그 기억을 품고 있다. 말없이. 아주 깊고 조용한 숨결로.

 

나는 이 책에서 선덕여왕 한 사람만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낭산이라는 신비로운 공간, 도리천 설화에 담긴 신라인들의 믿음, 비담의 난이 남긴 상처, 명활성의 바람, 사라진 절터의 침묵까지. 천년의 시간을 천천히 걸으며 그 안에 남아 있는 인간의 흔적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어쩌면 역사는 돌과 기록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된 숲길을 걷다가 문득 스쳐가는 바람 속에, 햇살 아래 조용히 누워 있는 능 하나 속에, 아직 말해지지 못한 시간들이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낭산은 지금도 그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들려주고 있다.

 


[DeliAuthor]

역사 속 오래된 장소를 천천히 걸으며, 그곳에 남은 시간의 결을 글로 담아내고 있다.

 

왕릉과 고찰, 오래된 길과 풍경 앞에서 역사와 사람의 마음을 함께 바라보며,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이야기를 건네본다.

 

이번 책 도리천에 잠든 여왕은 낭산을 따라 걸으며 만난 선덕여왕의 시간과 천년을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는 고요한 울림을 담은 기록이다.

역사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숨 쉬고 있다는 믿음으로 글을 쓴다.

 


[DeliList]

프롤로그

 

1. 낭산에 오르다

2. 선덕여왕이라는 사람

3. 흔들리는 왕국

4. 명활산성으로 가는 길

5. 낭산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