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마음이 쉬어가는 풍경 하나쯤 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푸른 바다가 그러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오래된 골목길이 그러할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늘 들녘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온 풍경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얼굴을 달리하면서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던 곳. 멀리 가지 않아도 만날 수 있었고, 특별한 약속 없이도 늘 나를 기다려주던 곳. 그곳이 바로 논과 밭이 이어진 농촌 들녘이었다.
요즘도 퇴근길이면 무심코 들판 쪽으로 시선이 향한다. 계절은 말없이 변하고, 논은 그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인다. 겨우내 얼어붙은 듯 고요하던 땅은 어느 순간 숨을 고르기 시작하고, 봄볕이 내려앉으면 농기계가 들어와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흙을 뒤집어 놓는다. 마치 긴 겨울잠을 자고 깨어나는 것처럼.
빈 논이 갈아엎어진 모습을 보면 어릴 적 기억도 함께 뒤집혀 올라온다. 흙냄새 속에 묻혀 있던 오래된 풍경들. 큰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먹던 점심밥, 어른들의 웃음소리, 논바닥에 발을 담근 채 모를 심던 사람들의 분주한 손길, 그리고 그 곁을 종종거리며 심부름하던 어린 나까지.
그 시절의 농촌은 늘 사람 냄새가 났다. 논 하나 심는 데에도 온 동네가 함께 움직였다. 오늘은 이 집 논, 내일은 저 집 논. 품앗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의 손이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다. 모심기 날은 힘든 노동의 날이면서도 어쩐지 잔칫날 같은 온기가 있었다. 땀은 흘렸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허리는 아팠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넉넉했다. 점심때가 되면 모두 큰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앉았다. 누군가는 새참을 날랐고, 누군가는 숟가락을 챙겼다. 들판에서 먹는 밥은 왜 그리 맛있었는지 모른다. 집에서는 남기던 반찬도 그곳에서는 꿀맛이었다. 바람 한 줄기 불어오면 사람들은 잠시 눈을 붙였고, 나뭇잎 사이로 흔들리던 햇살은 그 위에 조용히 내려앉곤 했다.
비 오는 날의 풍경도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다. 비를 맞으며 모를 심던 사람들. 젖은 옷자락, 흙 묻은 손, 그리고 점심 무렵이면 커다란 솥에서 퍼내던 뜨끈한 미역국. 쌀 새알이 동동 떠 있던 그 국 한 그릇에는 허기뿐 아니라 고단함마저 녹아내리는 힘이 있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는 트랙터가 논을 고르고, 이앙기가 모를 심는다. 예전처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하는 모습도 보기 어렵다. 논두렁을 따라 울리던 웃음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농사는 훨씬 편리해졌지만, 어쩌면 사람과 사람이 기대어 살던 시간은 조금씩 희미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들녘은 여전히 계절을 잊지 않는다. 봄이면 연둣빛 새싹을 밀어 올리고, 여름이면 짙푸른 생명을 키워내며,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을 흔들어 보인다. 겨울이 오면 다시 묵묵히 쉬어간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말없이, 그러나 단 한 번도 자기 순서를 놓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들녘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기쁜 날에도, 마음이 무거운 날에도 들판은 늘 같은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바람을 건네고, 익숙한 냄새를 내어주고, 계절의 빛깔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것을 들녘에서 배웠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법, 때를 아는 법, 애쓴 뒤에는 묵묵히 결과를 받아들이는 법을.
이 책은 그런 들녘에 관한 이야기다.
눈부신 풍경만 담으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안에서 땀 흘리며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 부모 세대의 삶, 어린 날의 추억, 그리고 자연이 내게 가르쳐 준 마음들을 천천히 꺼내어 보려 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오래전 들녘 하나가 남아 있다면, 잠시 그 길을 함께 걸어가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계절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풍경 속으로. 흙냄새가 묻어나는 기억 속으로.
그리고 우리가 지나온 시간 속으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오래된 길과 계절이 스민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들녘의 바람, 개구리 울음소리, 흙냄새처럼 사소하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 것들을 글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삶의 온기가 남아 있는 장소를 찾아 그 안에서 느낀 마음을 수필로 엮고 있다.
이 책 『들녘이 가르쳐 준 시간』 역시 어린 시절의 기억과 농촌 들녘에서 배운 삶의 마음을 담아낸 이야기다.
프롤로그
1. 봄, 깨어나는 시간
2. 모심기하던 날의 기억
3. 여름 들녘 초록이 자라는 소리
4. 황금 들판과 농부의 삶
5. 들녘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