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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끝에 선 여왕. 천년의끝에선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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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끝에 선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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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궁에 부는 바람

경주의 겨울은 유난히 고요하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도시는 화려한 말보다 침묵에 익숙하다. 사람들로 붐비는 관광지에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오래된 돌담과 낮은 골목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흐른다. 누군가는 그 바람을 계절이라 부르겠지만, 내게 경주의 바람은 늘 지나간 시간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어느 겨울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신라의 마지막 여왕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경주에는 수많은 왕릉이 있다. 둥글게 솟은 봉분 위로 계절이 지나고, 이름을 잃지 않은 왕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천년의 침묵을 이어간다. 그러나 어떤 이름은 남겨진 무덤조차 희미하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역사책 몇 줄 안에서만 겨우 살아남는다.

 

신라의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도 그러했다. 왕릉은 분명하지 않고, 머물렀던 궁궐은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그를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를 신라 멸망의 원흉이라 말한다. 또 누군가는 음란한 여왕이라는 낙인을 남겼다. 나라를 무너뜨린 군주라는 비난은 세월을 건너 오늘까지 따라온다.

그러나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이거나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일 때가 많다. 한 사람의 삶을 몇 줄의 평가만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 특히 나라가 기울어가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군주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진성여왕을 변호하려는 것도, 무조건 감싸 안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묻고 싶었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밤이면 풍악이 끊이지 않았다는 왕경의 불빛을 바라보며,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한 나라의 틈을 알고 있었을까. 백성들의 신음이 들려왔을 때 그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떠난 자리에서, 여왕은 얼마나 깊은 외로움을 견뎌야 했을까.

 

우리는 흔히 역사를 결과로 기억한다.

망한 나라, 실패한 정치, 무너진 왕조. 하지만 그 끝자락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기울어지는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던 한 사람이.

 

진성여왕은 신라의 세 번째 여왕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외로운 왕좌에 앉았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하는 시대의 왕이었다면, 진성여왕은 천년 왕국의 균열 앞에 서 있어야 했던 왕이었다.

 

나라의 끝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화려함이 사라진 뒤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찬란해 보일 때 균열은 안에서부터 자라난다. 삼국사기는 헌강왕 시절의 왕경을 풍요롭고 화려했다고 기록한다. 거리에는 노랫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풍요 속에서 살아갔다고 했다. 그러나 찬란함이 길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이다.


귀족들은 사치에 젖어 있었고, 지방의 백성들은 점점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었다. 왕경의 웃음소리 뒤편에서 누군가는 굶주렸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분노를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위에 한 사람이 왕관을 쓰게 된다. 뜻하지 않게 왕이 된 사람. 두 오빠 왕의 뒤를 이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에 오른 여왕. 진성여왕이었다.

 

오늘날 경주를 걸어도 그의 흔적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북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성동동의 전랑지에는 바람만 스치고, 인왕동 상서장에는 천년 전 한 젊은 학자가 나라를 걱정하며 붓을 들었을 뿐이다. 여왕의 무덤 또한 분명하지 않다. 마치 시대가 끝나며 그의 이름까지 함께 흐릿해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사라진 흔적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기록 속에서 실패한 왕이라 불린 한 사람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서. 천년의 끝에 서 있었던 여왕이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용히 묻기 위해서.

 

어쩌면 이 이야기는 신라의 마지막 여왕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무너지는 시간을 견뎌야 했던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경주의 바람은 오늘도 오래된 시간을 품고 분다.

그리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이름조차 희미해진 한 여왕을 다시 떠올려 본다. 천년의 끝에 서 있었던 사람, 진성여왕을.


[DeliAuthor]

역사와 시간이 머문 자리를 천천히 걷고, 그 안에 스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있다. 오래된 유적과 왕릉, 사라진 흔적 앞에서 멈추어 서기를 좋아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숨결을 문장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특히 신라의 왕과 여왕, 그리고 천년 고도 경주가 품고 있는 역사와 풍경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역사 속 인물을 단순한 기록이 아닌 한 사람의 삶과 마음으로 바라보며, 감성과 역사적 사실이 어우러진 수필 형식의 글을 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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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그 안에 머문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글로 남기고 있다.

 


[DeliList]

프롤로그

 

1. 왕관은 뜻하지 않게 내려왔다.

2. 무너지는 나라를 붙들다.

3. 신라는 왜 흔들렸는가.

4. 마지막 개혁, 그리고 내려놓음

5. 사라진 여왕을 찾아서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