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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머문 자리, 운곡서원. 숲이머문자리운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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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머문 자리, 운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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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셨나요?
[ComplexContentWithDelimiter][DeliAbstract]

숲이 나를 부른 날

사람에게는 문득 조용한 곳이 필요해지는 날이 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바쁘게 살아온 마음이 제 스스로 쉬어갈 자리를 찾을 때가 그렇다. 해야 할 일은 늘 앞에 쌓여 있고, 하루는 쉼 없이 흘러가는데 정작 내 마음은 어디쯤 와 있는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을 때, 사람은 저도 모르게 조금 더 느린 곳, 조금 더 고요한 곳을 떠올리게 된다. 내게 운곡서원은 그런 곳이었다. 숲이 먼저 다가와 마음을 풀어주고, 바람과 물소리가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곳. 굳이 무엇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 말 없이 오래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은 곳. 운곡서원은 내게 그런 쉼의 얼굴로 다가왔다.

 

처음 그곳으로 향하던 날은 6월의 끝자락이었다. 초여름이 가장 짙은 빛을 다 쏟아내고 있을 무렵, 나는 구름을 걷는 선비라는 이름의 문화 체험에 참여하기 위해 경주시 강동면 깊은 숲 자락으로 향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낯선 장소를 찾아가는 일에는 늘 조금의 설렘과 조금의 두려움이 함께 따라붙는다. 더구나 운곡서원은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공간이 아니라 숲속 깊은 자리에 몸을 숨기듯 자리한 서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어쩐지 다른 시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선 사람처럼 마음이 조용히 긴장되었다. 차는 점점 더 푸른 길 속으로 스며들었다. 창밖으로는 초여름 나무들이 길게 이어졌고,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들이 햇살을 잘게 부수며 반짝였다.


초록은 그날 유난히 짙었다. 산과 들이 저마다의 빛을 품고 있겠지만, 여름 문턱의 숲이 보여주는 초록은 유독 깊다. 연한 봄빛을 지나 이제 막 자기 색을 완성한 잎들은 눈이 시릴 만큼 선명했고, 그 짙은 녹음은 낯선 길을 향한 내 마음의 작은 불안을 천천히 눌러주었다. 차창으로 스치는 나뭇잎들이 꼭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 가는 길이었지만, 사람보다 먼저 숲이 나를 반겨주는 기분이 들었다.

 

운곡서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마음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도시에 있을 때의 나는 늘 무언가를 향해 서둘렀다. 오늘 해야 할 일, 내일 챙겨야 할 일, 잊지 말아야 할 일들 사이에서 마음은 자꾸만 앞질러 갔다. 그러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위에서는 그 속도를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보면, 계절의 빛을 온몸으로 머금은 산자락을 바라보다 보면, 사람은 어느새 제 호흡을 자연의 속도에 맞추게 된다. 운곡으로 가는 길은 단지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이 아니라, 바쁘고 거칠어진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도록 돕는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 내가 찾아간 운곡서원에서는 구름을 걷는 선비라는 문화 체험이 열리고 있었다. 이름부터가 마음을 끌었다. 구름을 걷는 선비라니. 그 말에는 현실의 시간에서 한 걸음 비켜선 듯한 여유와 속세의 분주함을 잠시 벗어난 사람의 뒷모습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선비복을 입고 갓을 쓰고, 붓글씨를 배우고, 다도의 예절을 익히며, 가야금과 대금의 소리를 가까이에서 접하는 시간이라 했다.

듣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환해졌다. 늘 입던 옷 대신 선비복을 걸치고, 익숙한 일상 대신 낯선 예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은 쉽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 체험은 단순히 옛 문화를 구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잠시나마 그 시대의 호흡을 몸으로 익혀보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시간은 내게 무척 특별하게 남았다. 선비복을 입고 갓을 쓰는 순간, 거울 속의 낯선 내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진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보다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고, 말 한마디도 괜히 단정히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신기했다. 붓을 들어 글씨를 써보는 시간에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고, 다도의 예절을 배우는 자리에서는 차 한 잔을 대하는 태도 속에도 마음을 다스리는 방식이 숨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가야금과 대금의 소리는 또 어땠던가. 그 맑고도 깊은 울림은 숲속 공기와 어우러져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짙은 녹음 아래 앉아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내가 지금 서 있는 시간이 오늘인지, 아주 오래전 어느 날인지 잠시 헷갈릴 만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잠깐 동안 다른 시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마음 한편이 낯선 감동으로 오래 흔들렸다. 하지만 운곡서원이 내게 남긴 것은 문화 체험의 즐거움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진 것은 체험이 끝난 뒤에도 그곳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웃고 배우며 지나온 하루가 즐거웠던 만큼, 그날 미처 다 보지 못한 운곡의 고요가 자꾸만 생각났다. 계곡물 소리가 서원 주변을 감돌던 풍경, 짙은 숲이 한옥의 지붕 위로 그늘을 드리우던 모습, 그리고 말없이 서 있는 오래된 나무들. 모두가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그 고요가 자꾸 마음을 불렀다. 그래서 며칠 뒤, 나는 다시 운곡서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누구와 함께가 아니라 혼자였다. 혼자 다시 찾은 운곡은 처음보다 더 깊고 더 조용했다.

 

체험의 설렘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숲의 본래 소리가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계곡물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흘렀고, 바람은 은행잎 사이를 스치며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새가 먼 숲속에서 울었고, 오래된 한옥의 처마 끝에는 한낮의 햇살이 조용히 걸려 있었다. 사람의 말이 잦아든 자리에서는 늘 자연의 소리가 더 선명해진다. 그날의 운곡은 내게 그런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 꼭 어딘가로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시간, 그냥 벤치에 앉아 바람과 나무와 물소리를 듣고만 있어도 충분한 시간. 운곡서원은 그런 느린 시간의 결을 내게 가만히 건네주었다.

 

운곡서원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유명한 명소도 아니고, 한눈에 압도당할 만큼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다. 운곡서원은 스스로를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입구에서부터 여기를 보라고 요란하게 손짓하는 대신, 숲길을 따라 조금씩 걸어 들어온 사람에게만 천천히 제 풍경을 내어준다. 먼저 작은 찻집 원두막이 반기고,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 마음의 속도를 늦추게 하고, 그 길 끝에서야 비로소 고즈넉한 서원의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기둥과 회색 기와, 햇살을 머금은 잔디와 오래된 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둘러싼 짙은 숲의 초록. 그 풍경은 처음부터 큰 목소리로 감탄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곁에 앉아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그곳에는 시간도 함께 머물고 있었다.

운곡서원은 1784년 경주 지역의 유림과 전국의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안동 권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공신인 권행을 주향으로 모시고, 단종의 이모부로 알려진 충민공 권산해와 명종 때의 학자 귀봉 권덕린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한때 건물이 헐리는 아픔을 겪었지만, 1930년 제단을 세워 제례를 이어왔고 197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경덕사와 정의당, 돈교재와 잠심재, 견심문, 그리고 조금 떨어진 용추 언덕 위의 유연정까지, 운곡서원을 이루는 건물들은 저마다의 이름과 역할을 지닌 채 한자리에 모여 있다.

 

1811년에 세워진 유연정은 도연명의 자연사상을 본받아 계곡 위에 지은 정자로, 주변의 숲과 물길과 한데 어우러져 운곡의 풍경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운곡서원을 특별하게 만드는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내게 더 오래 남은 것은, 그 역사와 풍경이 한데 겹쳐져 만들어내는 분위기였다. 권행과 권산해, 권덕린을 기리는 뜻이 스며든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걷다 보면, 서원의 마당과 기둥과 지붕도 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단지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한 세대가 지나고 또 다른 세대가 이어지며 지켜온 마음의 자리처럼 느껴진다. 한때 사라졌다가도 다시 세워지고, 제례가 끊기지 않도록 애쓴 사람들의 뜻이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운곡서원을 걷는 일은 단순히 예쁜 풍경을 보는 산책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오래 붙잡아둔 것은 운곡의 고요였다. 그곳의 고요는 텅 빈 침묵이 아니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새가 울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햇살이 기와 위에 내려앉는 소리까지 모두 품고 있는 살아 있는 침묵이었다. 그 고요 속에 서 있으면,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던 마음의 소리도 조금은 선명해진다. 내가 무엇에 지쳐 있었는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천천히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사람은 너무 큰 위로나 특별한 깨달음보다도, 이렇게 조용히 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 하나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운곡서원은 내게 바로 그런 시간을 건네준 곳이었다.

 

이 책은 그 운곡의 시간을 따라가 보는 기록이다. 처음 숲길로 들어가던 순간의 설렘과 낯섦, 선비 체험 속에서 만난 옛 풍류의 그림자, 며칠 뒤 혼자 다시 찾아가 걸었던 조용한 산책, 초여름 햇살 아래 빛나던 은행나무와 그 아래 놓인 벤치,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이 내게 건네준 느린 위로를 한 장씩 펼쳐보려 한다. 어쩌면 이 글은 운곡서원에 대한 안내라기보다, 운곡서원을 걸으며 내 안에 스며든 시간에 대한 산문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곳에서 단지 오래된 서원을 본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더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이상하리만큼 다정한 위로가 있었다.

 

언젠가 가을이 오면, 나는 다시 운곡서원을 찾을 것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바람이 금빛 잎들을 흔들며 지나가는 계절에 다시 그 벤치에 앉아보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은 그보다 먼저, 초여름의 운곡에서 시작하려 한다. 숲이 가장 짙은 초록을 품고 있던 계절, 계곡물 소리가 더 맑게 들리고,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던 날들. 나는 이제 그날의 운곡을 천천히 다시 걸어보려 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마음들을, 조심스럽게 한 장씩 꺼내어 놓으려 한다.


[DeliAuthor]

역사와 자연이 품고 있는 시간을 천천히 걸으며 글을 쓴다. 화려한 풍경보다 오래된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줄기 속에 스며 있는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인다. 경주의 왕릉과 사찰,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며 그곳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수필로 기록하고 있다.

 

이번 숲이 머문 자리, 운곡서원은 깊은 숲속에서 만난 한 서원이 들려준 고요와 쉼의 이야기다.

선비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이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와 느림의 가치를 담아보고자 했다.

앞으로도 역사와 자연이 만나는 길 위에서, 오래된 시간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이야기를 한 권 한 권의 책으로 엮어가고 싶다.


[DeliList]

프롤로그

 

1. 숲길 끝에서 운곡을 만나다

2. 서원에 깃든 시간의 결

3. 선비의 옷깃을 스치던 하루

4. 물소리를 따라 걷는 서원의 길

5. 은행나무 아래 머문 마음

6. 고요가 풍경이 되는 곳

7. 초여름의 운곡, 초록의 결을 읽다

8. 다시 가을을 기다리며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