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세월이 흘러도 문득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곳이 특별히 화려해서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지여서도 아니다. 오래전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갔던 장소인데도 어느 날 마음 한구석에서 조용히 이름을 불러 주는 곳이 있다. 옥산서원이 내게는 그런 곳이었다.
여고 시절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다녀왔던 기억은 오래전 흑백사진처럼 희미해졌다.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어떤 길을 걸었는지도 대부분 잊어버렸다. 다만 친구들과 나무에 올라 사진을 찍으며 한없이 웃었던 순간만은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기억 하나를 품고 수십 년 만에 다시 옥산서원을 찾았다.
십 대의 내가 걸었던 길을 예순 후반의 내가 다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먼지 폴폴 날리던 길은 넓은 도로가 되었고, 기억 속 풍경은 낯설 만큼 변해 있었다. 그러나 자계천을 따라 흐르는 맑은 물과 숲을 스치는 바람은 오래전 그대로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세월은 풍경을 바꾸기도 하지만, 어떤 풍경은 오히려 세월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옥산서원은 단순히 회재 이언적 선생을 기리는 서원이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가려 했던 선비 정신이 지금까지도 고요히 숨 쉬는 공간이었다.
너럭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와 숲의 적막은 바쁜 일상에 지친 마음을 천천히 내려놓게 했다.
서원을 거닐다 보면 건물보다 먼저 바람이 말을 걸어오고, 계곡보다 먼저 마음이 맑아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회재가 바라보았을 숲과 하늘을 함께 바라보게 되고, 자연 속에서 학문을 꽃피운 그의 삶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옥산서원의 건축과 역사만을 소개하려는 책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선비가 남긴 삶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그 길 위에서 다시 나 자신의 시간을 돌아본 기록이다. 숲과 계곡, 너럭바위와 자계천, 그리고 독락당까지 이어지는 길은 결국 마음을 향해 걷는 길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 여러분도 잠시 걸음을 늦추고 자계천의 물소리에 귀 기울여 보기를 바란다.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대의 이름처럼, 이 작은 여행이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쉼과 위로가 되어 주기를 소망한다.
경주에 머물며 천년의 역사와 자연을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글로 쓰고 있다. 빠르게 지나치는 여행보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며 그곳에 스며 있는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오래된 길을 걷고, 숲의 바람을 느끼며, 문화유산 속에 담긴 삶의 흔적을 글로 기록하는 일을 삶의 기쁨으로 삼고 있다.
나의 글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역사와 자연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길 위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을 독자들과 나누는 인문 기행 에세이다.
『너럭바위에 새겨진 선비의 숨결』은 회재 이언적의 삶과 옥산서원이 품은 선비 정신을 따라 걸으며, 자연이 들려주는 고요한 가르침을 담아낸 기록이다.
경주와 우리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인문 기행 시리즈를 꾸준히 쓰고 있다. 오늘도 천년의 시간을 걸으며, 마음을 기록하고 있다.
프롤로그
1. 다시 찾은 그 길
2. 자계천, 마음을 씻는 계곡
3. 선비의 길을 걷다
4. 고요 속에 피어난 배움
5. 독락당, 자연을 품은 집
6. 숲은 오래도록 말을 걸어왔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