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기도가 머무는 절터에서처음 사천왕사지를 찾았던 것은 계획된 여행이 아니었다. 선덕여왕릉을 향해 천천히 낭산 길을 오르던 어느 날, 길가에 자리한 넓은 절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사천왕사지였다. 마침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흩어진 주춧돌과 발굴 현장, 여기저기 세워진 가림막 사이를 잠시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그때는 그저 '언젠가 다시 와야 할 곳'이라는 생각만 품고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짧은 만남은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자료를 하나둘 찾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그 절터가 품고 있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사천왕사는 단순히 오래된 절이 아니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세운 호국불교의 상징이었고, 신라인들의 기도가 모여 있던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돌 하나 남지 않은 절터에도 역사는 살아 있었다. 부서진 기와 조각 하나에도, 풀숲 사이에 남겨진 초석 하나에도 천삼백여 년 전 이 땅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폐허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더 선명했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칼과 창만으로 나라를 지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의 가장 치열한 한복판에서도 백성들은 부처의 힘을 믿었고, 왕은 한 채의 절을 세우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다. 불력으로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흔들리는 민심을 다잡으며, 끝내 나라를 지켜 내고자 했던 그 간절함이 오늘의 사천왕사지를 만들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왕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승리의 기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에도 당나라의 야욕과 맞서야 했고, 통일된 나라를 지켜야 하는 더 큰 싸움을 이어 갔다. 살아서는 나라를 위해 쉼 없이 걸었고, 죽어서는 동해의 바위가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문무왕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일대기가 아니라 한 나라를 끝까지 품었던 한 왕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 감은사와 대왕암은 서로 떨어져 있는 유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문무왕이 남긴 하나의 기도이며, 나라를 지키려 했던 한 시대의 흔적이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돌보다 마음이 먼저 보이고, 유적보다 사람이 먼저 다가온다.이 책은 화려한 삼국통일의 역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덕여왕릉을 찾았다가 우연히 마주한 작은 절터에서 시작된 궁금증이, 문무왕이라는 한 왕을 만나고, 신라인들의 호국 정신을 이해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아 보려 한다. 천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절은 사라졌고, 건물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낭산에 울려 퍼졌을 기도만은 아직도 바람을 따라 이곳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제 그 오래된 기도의 길을 천천히 걸어보려 한다.
[DeliAuthor]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오래된 돌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고, 이름 없는 나무 한 그루에도 시간이 머물러 있음을 배운다. 경주의 산과 들, 왕릉과 절터를 찾아다니며 천년 신라가 남긴 발자취를 글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단순한 사실이 아닌 사람의 삶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여행의 감동을 따뜻한 수필로 담아내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이 책은 복원 중이던 사천왕사지를 잠시 둘러본 작은 인연에서 시작되었다.그날은 미처 다 보지 못했던 절터였지만, 시간이 흐른 뒤 문무왕의 삶과 호국의 정신을 다시 만나면서 한 권의 책으로 이어졌다. 앞으로도 오래된 유적 속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독자들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DeliList]프롤로그 1. 낭산 아래 멈춰 선 발걸음2. 삼국통일을 완성한 왕3. 호국의 염원을 품은 사천왕사4. 천년을 지키는 녹유신장상5. 외교가 지켜낸 나라, 망덕사6.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왕7. 천년의 바람이 머문 자리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