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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오백 년을 건너온 신라 공주. 천오백년을건너온신라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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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오백 년을 건너온 신라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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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셨나요?
[ComplexContentWithDelimiter][DeliAbstract]

오늘도 나는 걷는다.

경주의 길은 걸을 때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익숙하게 지나쳤던 길에서도 어느 날 문득 오래된 돌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무심히 바라보던 언덕 하나가 천오백 년 전 누군가의 삶이 묻힌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쪽샘 고분도 그랬다.

오래전, 한창 발굴 공사가 진행되던 때였다. 근처에 일이 있어 왔다가 시간이 조금 남아 무심코 발굴 현장을 둘러본 적이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흙더미와 돌무더기 사이로 깊게 파인 무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왕족의 무덤을 발굴하는 걸까?’

궁금증은 생겼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신라의 고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쪽샘이라는 곳이 어떤 의미를 가진 곳인지도 몰랐다. 그저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내가 가야 할 길로 돌아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날 잠시 바라보았던 무덤이 오랜 세월의 발굴과 연구를 거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언젠가 내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게 될 줄은. 그리고 그 무덤 속에서 천오백여 년 전 한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시간이 흘렀다. 쪽샘지구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곳이 단순한 고분 몇 기가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신라 왕경의 중심에서 왕족과 최고위 귀족들이 잠든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경주시 황오동과 황남동, 인왕동 일대에 자리한 쪽샘지구. 대릉원과 가까이 맞닿아 있고, 멀리 봉황대까지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에는 신라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무덤이 봉긋한 언덕처럼 자리하고 있다. 땅 위에서는 그저 낮은 봉우리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천오백 년 전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과 죽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쪽샘 44호분이었다.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에 걸친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그 무덤의 모습이 조금씩 세상에 드러났다. 돌을 켜켜이 쌓아 만든 거대한 봉분 아래에는 나무로 만든 목곽이 있었고,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수많은 유물이 함께 묻혀 있었다.

금동관과 금귀걸이, 가슴걸이, 은제 허리띠, 금제 팔찌와 반지, 금동신발.

그리고 비단벌레의 날개로 장식한 말다래. 바둑알도 있었다. 무덤 속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하나씩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더 이상 차가운 유물로만 보이지 않는다.

금동관은 한 아이가 살아 있을 때 머리에 쓰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작은 금동신발은 천오백 년 전 어느 날 그 아이의 발을 감싸고 있었을 것만 같다. 말다래를 바라보면 말을 타고 달렸을 어린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고, 바둑알 앞에서는 친구나 가족과 마주 앉아 작은 바둑판을 바라보았을 아이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리고 가장 마음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머리카락이었다.

천오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뎌낸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

그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아이는 어떤 아이였을까?’

왕의 딸인 공주였을까. 아니면 왕실에서 아주 귀하게 자란 어린 왕족이었을까. 정확한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어떤 꿈을 꾸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무덤 속에 남겨진 작은 흔적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어린 나이였다는 것.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아주 이른 나이에 삶을 마쳤다는 것.

 

나는 그 아이가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다. 천오백 년 전의 일이라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린아이들에게 치명적이었을 질병을 앓았을 수도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짧은 생을 마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덤 속 유물들을 보고 있으면 죽음보다 삶이 먼저 떠오른다.

작은 금동관.

작은 금동신발.

화려한 비단벌레 날개 말다래.

바둑알.

그리고 아이의 머리카락.

그것들은 이 소녀가 죽은 뒤의 모습보다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어쩌면 그 아이는 말을 타는 것을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바둑을 두며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궁궐의 어느 뜰에서 또래의 아이들과 뛰어놀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내가 유물을 바라보며 그려보는 상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주 작은 흔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쪽샘 44호분의 어린 주인도 그랬다.

천오백 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소녀가 이제는 자신이 남긴 유물을 통해 조금씩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쪽샘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발굴 현장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천오백 년 전 이곳에서 살았던 한 어린 소녀를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연일 폭염이 이어지고 있었다. 햇볕은 뜨겁고 아스팔트에서는 열기가 올라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은 가벼웠다.

샘 유적박물관에 들어서자 1,500여 년 전 신라의 한 소녀에게로 이어지는 문이 열리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그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오래 기다렸지요? 오늘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어요.’

천오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한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일에는 시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름을 잃어버린 소녀.

그러나 그녀가 남긴 작은 흔적들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오늘 그 흔적을 따라 걸어보려 한다. 쪽샘의 길을 걷고, 고분 사이를 지나고, 박물관에 전시된 작은 유물 앞에 오래 머물면서.


[DeliAuthor]

경주의 오래된 길을 걷고, 천년의 시간을 품은 유적 앞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걷는 길과 바라보는 풍경 속에도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름난 유적뿐 아니라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고분과 오래된 돌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며 그곳에 남겨진 이야기를 찾아갑니다. 경주의 왕릉과 고분, 서원과 사찰, 숲과 길을 걸으며 만난 역사와 풍경을 서정적인 수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천년 전의 왕을 만나고, 때로는 이름 없이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그들이 남긴 작은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 속 사람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번 책에서는 쪽샘 44호분에서 천오백 년의 시간을 건너온 한 어린 신라 공주를 만났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 작은 금동관과 금동신발,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한 말다래와 바둑알, 그리고 천오백 년을 견뎌낸 머리카락이 그녀의 존재를 조용히 들려주었습니다. 그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역사보다 먼저 한 아이의 삶이 보였고, 그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걷고 싶습니다. 경주의 오래된 길을 걷고,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사라져가는 시간 속에서 아직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작은 흔적들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나는 걷습니다. 역사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만나기 위해.

 


[DeliList]

프롤로그

 

1. 천오백 전, 한 소녀가 잠들다.

2. 금동관을 쓴 어린 공주

3. 비단벌레 날개에 피어난 꽃

4. 말과 바둑을 좋아했던 소녀, 그리고 마지막 길

5. 천오백 년을 건너온 부모의 마음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