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대릉원으로 가고 싶었다
가을이 시작되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는 여름의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저녁이 되면 바람 끝이 제법 시원했다. 계절은 그렇게 소리 없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도 평소처럼 산책을 나서려 했다. 황성공원이나 한 바퀴 걸을까 생각하며 집을 나섰는데,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아, 대릉원 미디어아트가 시작됐지.’
작년에 뉴스에서 잠시 보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어둠 속에 우뚝 솟은 고분을 배경으로 빛이 흐르고, 신라의 이야기가 영상으로 되살아나는 모습이었다. 화면으로 보면서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내년에는 꼭 가봐야지.’
그렇게 마음먹었던 기억이 그날 밤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발길을 대릉원으로 돌렸다. 경주에 살고 있다는 것은 가끔 이런 작은 행운을 준다.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천년의 시간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조금만 걸으면 오래된 왕릉이 나오고, 골목을 지나면 신라의 흔적이 나타난다. 그날은 그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은 경주의 거리를 한 시간쯤 걸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거리마다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가로등 아래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낮에는 익숙하기만 했던 경주의 거리가 밤이 되자 조금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형형색색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고, 나는 천천히 그 길을 걸었다.
타박타박.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저 가을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마침내 대릉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와…….”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나왔다.
낮에는 초록빛 잔디와 나무 사이로 고요하게 누워 있던 고분들이 밤이 되자 빛을 품고 있었다.
천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고분의 둥근 곡선 위로 빛과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천년의 시간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때 또 한 번 놀랐다.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대릉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 그리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부모들이 산책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맑게 퍼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커다란 소망볼 앞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적고 있었다. 아마 저마다의 소망이 있을 것이다.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어떤 소원을 적었을까.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고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천년 전의 신라를 보여주는 자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소망을 품고 함께 걷고 있었다.
천년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밤이었다. 나는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빛이 흐르고 있었다. 고분 위로 신라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어둠 속에서는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들이 반짝였다. 낮의 대릉원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그날 밤 대릉원을 걷으며 생각했다. 천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뎌온 신라의 흔적이 오늘 밤에는 빛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아마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미디어아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천년의 역사와 오늘의 삶이 만나고,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빛을 통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그저 한 사람의 관람객이 되어 있었다. 시원한 초가을 밤바람을 맞으며, 천년 신라가 빛으로 되살아난 대릉원을 걷고 있었다.
걷고 바라보며 글을 쓴다.
자연과 계절, 오래된 길과 그곳에 남겨진 이야기를 좋아한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찾아 천천히 걸으며, 마음에 남은 순간들을 글로 옮긴다.
경주에 살며 천년의 역사와 오늘의 일상이 만나는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오래된 유적 앞에 서서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고, 계절의 빛과 바람 속에서 지금의 삶을 돌아본다.
이번 책에서는 미디어아트로 다시 피어난 대릉원의 밤을 걸으며, 천년 신라의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작은 풍경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이며,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오래 남을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작은 꽃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이며 오늘을 조용히 피워낸다.
프롤로그
1. 가을밤, 대릉원으로
2. 천년의 무덤이 빛이 되던 밤
3. 빛이 된 신라의 기억
4. 소망을 적는 사람들
5. 낮과 밤, 두 얼굴의 대릉원
6. 천년 뒤에 다시 피어난 신라
에필로그